알림방
성지순례문의전화 041-943-8123
  • 월 ~ 주일 : 09:00 ~ 17:00

    (오후 5시 이후 성지 출입 불가)

  • 사제관 : 월요일 휴무
  • 수녀원 : 월요일 휴무
  • 사무실 : 월요일 휴무

자유 게시판

최양업 신부님의 다섯 번째 편지 

  • 별빛지기
  • 2019-07-16
  • 743

● 최양업 부제의 다섯 번째 편지 

발신일 : 1847년 9월 30일

발신지 : 상해(上海)

수신인 : 르그레주아 신부

 

예수 마리아 요셉, 

지극히 공경하고 경애하올 르그레주아 신부님께

홍콩에서 조선으로 항해하려 할 즈음에 신부님께 짧은 (넷째)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그때 저는 신부님께 알려드릴 좋은 소식이 있을 때까지는 신부님께 다시 편지 쓸 기회가 없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 희망은 좌절되어 어쩔 수 없이 본의 아니게 신부님께 고통과 걱정을 더해드리고 있습니다.

황포에서 7월에 출범한 우리는 다행히도 조선 근해에서 첫 섬을 발견할 때까지 별 탈 없이 무사히 항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육지로 들어가는 포구에서 심한 돌풍을 만나 함선이 파도에 휩쓸려 모래 위에 좌초되었고 이내 파선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섬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래서 함장은 지체 없이 종선(從船)을 상해로 보내어 서양 함선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는 피신한 섬에서 한 달 이상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왕도(서울)에서 한 관장이 다녀갔습니다. 인근 고을의 관장들은 우리에게 매우 인정있고 너그럽게 대했습니다. 음식물도 풍부하게 공급하여 주었고, 우리를 중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거룻배와 식량과 기타 필요한 것들을 모두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대신들은 세실(Cecile) 함장의 (그 전해에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의 살해를 문책한) 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만일 라피에르(La Pierre) 함장이 이에 대하여 명백히 썼더라면 그들은 틀림없이 회답하였을 것입니다. 라피에르 함장은 우리가 머무르고 있던 지역인 전라도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주로 식량과 배만 청구하였고, 조선 왕국의 대신들의 회답을 요구하는 데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비록 세실 함장의 편지에 대한 회답은 없었지만, 라피에르 함장이 그들에게 청한 것은 그대로 다 들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조선 해안에 이렇게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는데도 조선 신자는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혹시나 신자들에 대해 무슨 소식이라도 좀 알아낼 수 있을까 하여 날마다 탐문하여 기웃거렸습니다.  

저의 동포들을 보기도 하고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니 크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제가 그들과 담화할 기회가 생겼을 때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저녁이 되면 혹시 신자의 거룻배가 우리에게로 오지나 않을까 하여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기대도 하고 기도도 하느라고 애가 바짝바짝 탔습니다.  

하루는 우리가 가장 가까운 고을의 관원들한테 가서 어떤 일에 대해 협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조선 사람들 몇 명과 함께 그들의 작은 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저는 그 조선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혹시 저의 본색이 탄로날까 봐 조선말을 하지 않고 손바닥에 한자를 써가면서 대화하였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저에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아느냐?” 고 물었습니다. 

“알고말고요! 잘 압니다. 당신도 압니까? 당신은 그들을 공경합니까?” 하고 제가 그에게 대답하는 동시에 조급하게 물었습니다. 그는 그렇다고 시인하면서 우리 둘레에 있는 외교인들에게 들킬까 봐 조심스러워 이내 대화를 중단했습니다. 

저는 몰래 기회를 엿보아 남에게 들키지 않게 그의 손을 살며시 잡아 끌어당기고 한문을 써가면서 “당신 가족이 전부 신자입니까? 신자들이 어디에 살고 있습니까? 혹시 신자 거룻배가 있습니까?”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그의 온 집안이 모두 다 신자이고, 대공소라는 곳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우리가 있는 고군산(古群山) 섬에서 백 리가량 떨어져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레, 즉 우리 배가 출발하기 전날 신자의 작은 배 한 척이 이리로 올 것이라고 귀띔해주었습니다. 

저는 계속하여 여러 가지 다른 것을 물어보았으나 그는 손을 빼고 더 이상 대답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큰 희망과 조바심을 가득 안고 신자들을 기다렸지만 끝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밤에는 조선 거룻배들이 사방에 횃불을 켜고 경비하였고, 낮에는 아무도 우리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관원 한 사람을 따로 붙들고 “조선에 천주교 교인들이 있습니까? 임금님은 아직도 천주교를 박해합니까?” 하고 은근히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임금님이 천주교인들을 혹독하게 벌하고 많은 천주교인들을 죽였으며 아직도 죽인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함장이 조선 대신들에게 편지 한 통을 보내면서 그리스도교에 호의적인 중국 도광(道光) 황제의 칙령 사본 한 통을 함께 보냈습니다. (1844년 10월에 청국과 프랑스가 황포 조약을 맺었다. 이로서 중국에서 천주교의 금지 조처가 완화되었다.) 

그러고는 다음해까지 다른 함선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저는 고군산 섬에 남아 있기를 원하여 함장에게 여러 번 청하였으나 함장은 저의 뜻에 결코 동의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원까지 하면서 간절히 소망하여 마지않았고 또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여기가지 왔는데, 이제 손안에까지 들어온 우리 포교지를 어이없게 다시 버리고 부득이 상해로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직도 낙담하지 않으며 여전히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고 하느님의 전능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섭리에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도 하느님 안에서 항상 영원히 희망을 가질 것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려고 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맡겼으니 그분을 언제나 믿을 것입니다.

주여 보소서. 우리의 비탄을 보시고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 우리의 죄악에서 얼굴을 돌리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성심에 눈길을 돌리시어, 당신을 향하여 부르짖는 성인들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공경하올 사부님께, 지극히 미약한 조선인 최 토마스가 엎드려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