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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님

최양업 신부님의 일생

 

 

1. 어린 시절

2. 부모님의 순교

3. 유학

4. 기해일기 작성

5. 조선에서의 헌신적인 사목

6. 선종

7. 시복청원

8. 가경자

 

 

1. 어린 시절

최양업(崔良業, 182131~ 1861615)은 조선 후기의 가톨릭 사제이다. 본관은 경주이며,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본명은 최정구(崔鼎九)이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두 번째 사제이자 첫 번째 신학생이다. 조선 시대에는 홍주(지금의 홍성군)골에 속했으나 지금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라는 행정 구역명으로 불리고 있는 다락골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984년 시성)와 복자 이성례 마리아(2014년 시복)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791년 신해박해를 피해 조부인 최인주가 다락골에서 빈 땅을 개척하여 살았는데,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교우촌이 되었다 한다.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사는 서울로 이사했다가, 안양의 수리산 담배 마을에 정착한 최씨 일가는 이곳에 교우촌을 만들고 1836년에는 최양업을 신학생으로 마카오로 떠나보낸다.

 

 

2. 부모님의 순교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인 최양업은 아버지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1984년 시성)와 어머니 복자 이성례 마리아(2014년 시복)1839년 기해박해 때 모두 여의었다. 천주교 성지인 충북 제천 배론성지에는 최양업 신부를 기념한 그림이 있는데, 경기도 수리산에 살던 중에 검거되어 최경환은 옥사,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어머니 이성례는 막내아들이 감옥에서 아들인 스테파노가 굶주림 끝에 죽자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철회하여 석방되었다. 하지만 아들이 천주교 신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다시 수감되자 용기를 내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이때 조선에 남아있던 최양업의 동생 야고보가 동생들과 거지꼴을 면하지 못했음에도 엄마를 돌보았는데, 참수형 전날에는 동냥하여 가져온 돈을 사형집행인에게 주고, 고통을 덜 받게 단칼에 엄마의 목이 떨어지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인 최한일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탄압을 받았으므로 오랫동안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으며, 자주 도피생활을 해야 했다. 최종적으로 최양업의 집은 당시 경기도 과천시 수리산 자락에 자리 잡게 되었다.

 

 

3. 유학

1836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소속의 선교사인 모방 신부의 천거로 김대건, 최방제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듬해 18376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신학교에 도착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피에르 모방 신부는 조선에서 비교적 가까운 북경신학교나 중국인 신부양성소를 탐탁스럽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이 마카오까지 가서 유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18371126일 친구 최방제가 풍토병(위열병)으로 숨을 거두자, 1842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명으로 마카오를 떠난 최양업과 김대건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이동, 학업을 계속했다.

1844년 동료 성 김대건 안드레아(1984년 시성)와 함께 부제품을 받은 그는 먼저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귀국로를 물색하던 중, 한국의 밀사들에게서 1846년의 병오박해와 김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는다.

 

 

4. 기해일기 작성

1844년 최양업과 김대건은 부제 서품을 받고 고향인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만주와 내몽골 일대를 떠돌았다. 1845년 친구인 김대건은 중국 상하이 금가항 성당에서 천주교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의 서품성사 집전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였으나, 최양업은 18461월에 입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184612월에 재차 입국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홍콩으로 이전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돌아가 조선의 기해박해 때 순교한 현석문의 일기를 편집하여 기해일기라는 책을 저술하고 이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1850년 초부터 116개월간 쉼 없이 사목방문을 하는 중에도 최양업 신부는 한문 교리서와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했고, 순교자들의 기록을 수집했으며, 선교사의 입국을 돕는 한편 조선 신학생들을 유학 보냈다.

 

 

5. 조선에서의 헌신적인 사목

최양업은 1847년과 1849년 다시 입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849년 청나라천주교회의 강남교구장인 마레스카 주교에게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요녕성에서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주일학교 사목을 하다가 그 해 12월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다.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장(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인 장조제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나고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한 최양업은 6개월 동안 삼남지방 5천 리를 돌면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 이후에도 매년 129개의 공소를 돌며 116개월간 사목하였으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신념을 위해 헌신한 성직자였다. 조선에 파견되는 선교사들은 파견되기 전에 조선의 실정과 풍습을 익힐 것을 마카오 신학교 선생이자 파리외방전교회 홍콩 극동대표부장인 리브와 신부에게 주장하였다. 천주교 신앙이 한민족의 자주적인 신앙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는 신학을 공부한 지식인이었지만, 학문이 없는 평신도들을 한글로 교리를 가르치는 세심함으로써 배려했다. 최양업 신부는 사회개혁가이기도 했다. 그는 민중들의 소외, 양반계급의 무위도식등을 비판함으로써 신분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6. 선종

최양업은 1861615일 영남 지방의 사목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도중에 과로와 식중독으로 40세의 나이에 문경에서 병으로 선종하였다. 그 후 제천시 배론에 안장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때 비석과 묘비를 세우려고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이루지 못하다가 1945년 비석과 묘비를 세웠다.

 

 

7. 시복청원

최양업 신부의 시복 추진이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이다. 1996-1997년 청주교구 배티 성지에서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을 간행하며 시복 청원을 준비했으며, 1997년 주교회의 추계 정기총회에서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 작업을 통합 추진하기로 결의하면서 최양업 신부의 시복 안건도 함께 논의되기 시작했다. 2001년 주교회의는 추계 정기총회를 통해, 주교회의가 최양업 신부 시복 시성 안건의 청구인이 되어 절차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 법정은 2005123일의 첫 회기를 시작으로 4년간 13회 열렸으며, 종료 회기는 2009520일에 있었다. 같은 해 63, 주교회의는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시성 법정 문서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했다.

2009년 시복 문서를 접수한 교황청은 문서들을 면밀히 검토해 정리한 뒤, 시복 안건의 최종 결정을 위해 보고관이 작성하는 최종 심사자료인 포지시오’(심문 요항)2014823일 시성성에 제출했다. 교황청 시성성 역사위원회 심의는 20141118, 시성성 신학위원회 심의는 20151215, 성덕 심사의 최종 단계인 추기경과 주교들의 회의는 2016314일에 열렸다.

김대건 신부는 '피의 순교자'라 하여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순직이었기 때문에 시성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에 '땀의 순교자'라는 호칭이 그에게 붙여졌으며, 2001년부터 한국 천주교회에서 불기 시작한 한국 시복시성운동의 일환으로 2004년 최양업 신부와 124명의 순교자들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 교황청에 시복청원을 해놓은 상태이다.

증거자 최양업 신부의 시복 추진 건이 같은 시기에 시복 추진을 시작한 순교자들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은 기적 심사때문이다. 시복 시성에 관한 교황령(교황 요한 바오로 2, ‘완덕의 천상 스승25, 1983.1.25.)과 교황청 시성성 지침(‘주교들이 행할 예비 심사에서 지킬 규칙32-34, 1983.2.7.)에 따르면, 증거자의 시복 조사에는 기적 심사를 하게 되어 있다. 순교자는 순교 자체를 기적으로 보아 기적 심사가 면제된다.

한국 교회에서 순교자가 아닌, 증거자의 시복을 추진한 것은 최양업 신부가 처음이다.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의 경우 교황청 시성성으로부터 순교 사실을 인정받은 뒤 바로 시복이 결정됐기 때문에 기적 심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증거자는 기적 1건이 입증돼야 복자품에 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에 대한 기적 심사는 한국 교회가 실시한 최초의 기적 심사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8. 가경자

한국인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 201658일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인준을 받아 가경자로 선포되었다 2009년 교황청에 시복 문서 제출한 지 7년 만이다. 이제 기적 심사 통과하면 시복이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시복을 추진 중인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1821-1861)의 시복 안건이 2016314일 추기경과 주교들의 회의를 통해 교황청 시성성의 성덕 심사를 통과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6426일 교황청 시성성 장관 안젤로 아마토 추기경을 접견하시고, 최양업 신부의 영웅적 성덕(heroic virtue)을 인정하는 시성성 교령을 승인하셨다. 이 소식은 바티칸 통신(VIS) 427일자에 공표되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가경자’(可敬者, Venerable)로 선포됐다. ‘가경자란 교황청 시성성 시복 심사에서 영웅적 성덕이 인정된 하느님의 종에게 붙이는 존칭이다. 가경자로 선포된 증거자는 그의 전구(轉求, intercession: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간청하고 탄원하는 행위)를 통해 기적이 일어났음을 입증하는 기적 심사를 통과하면 시복이 결정된다.

이제 남은 절차는 교황청 시성성의 기적 심사입니다. 시성성은 우선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제출한 심사 문서를 토대로 한국 교회 차원의 기적 심사가 교회법적 절차를 잘 따랐는지 확인합니다. 이후 시성성 의학전문가팀이 치유 기적이 현대 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인지를 검토합니다. 이 단계를 통과하면 시성성 신학위원회가 기적이 가경자의 성덕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확인합니다. 마지막으로 시성성 추기경위원회가 앞선 검토 내용을 바탕으로 기적 심사 판결을 내립니다. 최종적으로 교황이 추기경위원회의 판결을 인정하면 최양업 신부의 시복이 결정됩니다.

 

시복시성특별주교위원회 총무 류한영 신부는 교황청 시성성 소속 의학전문가들이 매우 정밀하게 내용을 검토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절차를 앞두고 있다면서 정확한 마무리 시기를 알 순 없지만, 적어도 최양업 신부 탄생 200주년인 2021년엔 심사가 마무리돼 시복 결정 여부를 알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로 신앙을 증언한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 당대의 유일한 한국인 사제로서 신자들을 위해 조선 팔도를 누빈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