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소개
성지순례문의전화 041-943-8123
  • 월 ~ 주일 : 09:00 ~ 17:00

    (오후 5시 이후 성지 출입 불가)

  • 사제관 : 월요일 휴무
  • 수녀원 : 월요일 휴무
  • 사무실 : 월요일 휴무

줄무덤 성지

줄무덤 성지

병인박해 시절 무명 순교자들의 묘

한 무덤에 여러 사람을 함께 묻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줄묘라고도 부른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천주교들을 탄압할 때 홍주감옥에서 순교한 교도들이 매장되어 있다. 총 37기가 있으며, 주로 가족 단위로 매장되어 있다. 주위에 없어진 10개의 인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교 탄압 때 마을 전체가 화를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직후로 추정된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인 최한일(崔漢馹)이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죽고 곧이어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자, 증조모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외아들 최인주(崔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를 데리고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청양 지역에는 이미 그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신해박해 때에는 홍주(洪州)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티우스)과 원베드로, 청양의 황바오로 등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장성한 뒤 이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700m 되는 골짜기로 이주하였다. 그뒤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新垈]’로 명명되었다. 최양업 신부와 그의 아버지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체스코)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 1830년대 초에 경기 안양의 수리산(修理山)으로 이주하였다. 그뒤에도 다락골의 신자들은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해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체포되었거나 피신하였다. 현재 이곳의 뒷산에 있는 30여 기의 줄무덤은 이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홍주나 공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설과 해미나 보령(保寧) 갈매못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당시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이 줄무덤을 만들었는데,

박해가 두려워 천주교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던 중 관아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마을을 불살라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후 대전교구와 청양성당에서 이곳의 줄무덤을 조사하여 그중 14기가 순교자의 무덤인 것을 밝혀냈다. 1982년 이곳에 무명 순교자비를 건립하고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내포지방에 대한 박해의 손길은 이곳 다락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갈 때 어린 아이들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간다."라고 달래어 함께 천당으로 데리고 갔다 합니다. 그 당시에 감영은 홍주, 그러니까 지금의 홍성에 있었습니다.

1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여기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무덤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전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오기선 요셉 신부님은 당신의 회고록인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 줄무덤에 대하여 두가지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1952년 당시 청양 사람들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하였던 최영천 노인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에 오 신부님은 이곳을 현지 답사하여 순교자들의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증언은 1920년대에 공주에 사시던 송 아오스딩 노인께서 "청양 고개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하시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250여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셨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느라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고 오기선 신부님께서는 증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곳 줄무덤 안의 주인공들은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청양 성당에서는 이곳에 무명순교자 묘비를 세우고 1982년 11월 23일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1986년 2월 16일 줄무덤에서 150년 된 십자고상과 묵주 1점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구전으로만 전해진 이곳 줄무덤이 순교자 1986년 3월 11일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성해 일부를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서 모셔왔다. 순교 후 147년 만에 고향에 환향하신 것이다.

줄무덤의 기수

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에 의해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 1,2,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제1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습니다. 오기선 신부님의 증언에는 17라는 하셨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씨들이 임자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습니다. 제 1줄무덤 서남쪽으로 밑으로 20m 쯤 떨어진 지점에 0기의 제2줄무덤이 있습니다. 제3줄무덤은 제1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는데 13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곳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됩니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82년 대전교구에서는 이들 무명순교자들을 위한 묘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습니다.

줄무덤 초창기의 기록

줄무덤에 순교자들의 묘가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구전(口傳)에 의해 것이다.

1줄무덤에는 경주 최씨 화숙공파의 순교자들이 묻혔고, 2줄무덤에는 화숙공파가 아닌 다른 최씨들, 3줄무덤에는 다른 성씨의 순교자들이 묻혔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구전이다.

구전이라 하여 모두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락골 교우촌의 특성과 위에 제시한 간접 자료들을 참조할 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간 전해진 구전이나 직·간접 자료들을 종합하여 연구한 적이 없으므로 학문적인 차원의 재검토는 반드시 필요하다.

「줄무덤 성역화 사업」(1984년)

가. 줄무덤 기수: 줄 묘는 3단으로 되어 있으며 하단 5기, 중단 8기, 상단 1기 총 14기로 되어 있다. 오 신부님은 17기라 하였는데 최상단에 묘를 새로 쓴 것으로 보아 최소한 3기는 파묘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를 뒷받침할 만한 봉분 흔적이 있다. 신자들이 아닌 관계로 돌보는 이 없는 무덤이라 파묘해 내려오던 참이었다고 최충기씨는 말한다.

나. 현주소: 줄무덤이 위치한 곳은 정확히는 화성면 화강리 산 63-1번지이다.

다. 소유자: 崔忠基 외 3인 外 3인으로 등기가 되어있다. 지난 1984년 9월 최씨들로부터 무기한 사용승락서를 받아냈으며 소유자 명단이 나와 있다.

라. 토지사용승락서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토지사용승락서를 받아내서 한 부는 최충기씨가 소지하고 일부는 대전교구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토지사용승락서
토지소재: 충남 청양군 화성면 화강리
지번: 산 63-1번지
지목: 임야
사용지: 줄무덤과 그 일대
내용: 우리는 줄무덤 성지성역화사업을 위해 기존묘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위 지역 내에 있는 줄무덤과 그 주변일대를 재단법인 대전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에서 무기한 사용할 수 있도록 승낙하는 바입니다.
1984년 9월 22일

토지소유자
농암 394번지 270328-1465110 崔忠基 인감
동리 623번지 360515-1465116 崔忠基 인감
〃 393번지 440228-1465119 崔忠基 인감
〃 662번지 381028-1465115 崔忠基 인감
천주교 청양교회 방윤석 신부 귀하

마. 토지매입
1984년 11월 21일 현재 아래의 토지를 매입하였음
崔忠基 농암리 617-2 沓 331㎡
617-1 田 3,970㎡
617-4 田 965㎡
산 38 林 7,934㎡
李衣斗 농암리 666번지 田 496㎡
667번지 田 400㎡
664번지 田 357㎡
669번지 田 853㎡

「줄무덤 史的 자료」(1986년)
줄무덤 안의 시신은 과연 천주교 순교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구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정확한 역사적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 구전은 이러하다.

오기선 요셉 신부의 조사록

오 신부(1907~1990)의 “곡예사(曲藝師)같은 인생(人生)”이란 사제생활반성기(記) 89쪽 “백일홍만 꽃이냐 해바라기도 꽃이다”라는 제하(題下)의 글에서 증언한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6.25 전쟁 후 오 신부는 고아원을 경영했는데 1952년에 ‘충남 사회사업 연합회’가 조직되어 연합회장직을 맡았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읽고 청양 다래꼴을 알아보고서 청양 보육원 원장인 조상열(趙湘烈)씨를 만나 다래꼴을 알아봐 줄 것을 청하였다. 한 달 만에 조상열씨가 조사해온 내용은 아래와 같다.

조상열씨의 조사 내용 (동서 92쪽)

전에는 청양군이 아니고 홍주(洪州)군 청양면이었다고 한다. 다래골은 웃동네와 아랫동네가 있는데 최씨 집안은 웃동네(樓上洞)에 살았다 한다. 행정 구역상으로는 충남 청양군 화성면 현암리(農岩里라고도 함)라 하는데, 보통 농암(農岩)이라고 한다. 다락골 상동(上洞)에 사는 최영천(당시 87세)씨는 자기가 17세 때 그 동네 역사를 다 보았다고 한다. 최신부의 5대손 되는 최창업(이미 작고)씨가 있었다 하며, 지금 생존해 있으면 107세 되는 최?? 씨 말씀에 윗다락골 산너머 많은 무덤이 있고 제일 높은 곳에 쌍무덤이 있는데 최신부의 십대조부모 산소라고 했다 한다. 이상은 조상열씨의 증언이다. 조씨는 1983년 12월에 작고하였다. 계속해서 오 신부의 증언을 듣기로 하자. 아래는 본문내용 그대로이다.
“1964년 9월 30일 충남 출신 15명 신부님들과 같이 최 신부님 출생지를 순방하게 되었다. 위에 말한 조 원장님의 말대로 모든 것이 일치하였고, 최영천 노인, 최장세(최 병훈=최 신부님 직계손)씨를 만났고 최 도마 신부 사시던 집터가 어디였으리라 가르쳐 준다. 다락골 산 넘어가면 줄무덤 17기가 나란히 쉬고 있다. 그전부터 안 베다 선호(安 仙鎬 방지거회 신부)신부의 외조부 손 아오스딩(35년 전 별세)께서 공주군 마살미에서 사시면서 「청양고개 너머에 숱한 치명자(致命者)묘가 있느니라」하셨다.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복자 성가를 전부 비창한 가운데 읊고, 거기 있는 노인들의 말씀에 의하면 홍주 (지금의 홍성읍(洪城邑)) 감옥에서 또 洪城 동편 성밖에 내어버린 치명자들의 시체를 야밤을 타서 몰래 청년들이 업어다가 이렇게 줄줄이 매장했을 뿐 아니라, 공주 감옥(지금 형무소 동북편 담밖)뒤 황새바위에서 약 250명 교우가 치명하였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칠야를 타서 여기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기에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는 전설을 들을 때, 치명자의 후손으로 치명자들을 공경하는 열심이 점점 자지러지는 교우들 심정이 자못 구슬렀다….” 이상은 본제하 96쪽에 나오는 글이다.

최충기씨의 증언

최충기씨는 최 신부의 7대 방조 후손되는 분이다(1927년생). 이 마을에서 나서 현재(1984년)까지 살고 있다.
그분의 증언에 의하면 박해시 홍주감영에서 순교한 최씨 일가를 야음을 틈타 업어다가 급히 묻었기 때문에 줄무덤을 지었다고 들었다 한다. 홍성까지의 길이가 약 50리이고 보면 아침 먹고 홍성장을 보고 다시 와서 점심 먹는 거리였다 한다. 최씨 말에 의하면 최씨가 어렸을 때(약 12세 때) 어떤 갓 쓴 할아버지가 12세 쯤 된 어린 아이를 데리고 매년 우리 한국식 절기가 아닌 시기에 찾아와서 무언가 기도를 바치고 갔다고 한다. 그 분은 부여 은산 쪽에서 왔었다 하는데 최충기의 조부 최계식(崔桂植, 1874~1933)씨가 천주교 믿으면 집안 망한다고 그 분을 못 오게 했다 한다. 이 줄무덤에 성묘하러 오던 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필자 생각엔 절기 아닌 때는 아마도 추사이망 첨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어린 아이를 만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금은 아마도 55~60세쯤 되었을 것이다.

이금수씨의 증언

서울 명수대 본당 성모회장 이금수 할머니(1983년 당시 63세)는 15년 전에 지금의 동정성모회 소속 황 수녀와 같이 줄무덤 성지순례 왔다가 84세 정도의 노인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어려서 부모로부터 들은 얘긴데 포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갈 때 어린 아이들이 안가려고 울며 떼를 쓰니까 부모가 ‘얘야! 지금 죽어서 천당 간단다’하며 달랬다”한다. 이렇게 붙잡혀가서 죽은 신자들을 일가족씩 줄을 지어 묻었다고 증언하였다. 이 마을의 구전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대체적으로 義兵(의병)때 죽은 신자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의병 때란 아마도 동학란인 것 같다.

줄무덤 안의 순교자에 대하여 언제 순교했는지 과연 누구인지를 고찰해 보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홍주감영에서 죽었든 한결같이 ‘천주교 치명자의 무덤’이란 사실에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천주교 순교자란 점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나머지는 부수적이라고 생각된다. 나중에 기회 되는대로 발굴한다면 더 좋은 확실한 것들이 밝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