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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박해시절 피난처

기해박해시절 피난처

기해박해시절 프랑스 선교사 신부들의 피신처 다락골

청양 다락골은 기해박해(1839)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교우촌이었다.

2명의 프랑스 선교사 모방, 샤스탕 신부가 피신해 있다가 앵베르 주교의 권고로 자수한 곳이 다락골이다.
모방 신부의 마지막 편지,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 등 각종 자료에서 다락골이 언급되고 있음에도 이 사실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1839년 8월 모방, 샤스탕 신부는 박해를 피해 전라도로 가던 중 모방 신부는 다락골에 남고 샤스탕 신부는 보다 안전한 곳을 찾으러 전라도로 떠났다.
이때 먼저 체포된 앵베르 주교로부터 자수를 권고하는 편지가 모방 신부에게 도착했고, 모방 신부는 샤스탕 신부에게 전갈을 보내어 다락골로 오도록 했다.
샤스탕 신부가 오기를 기다리는 열흘 동안 모방 신부는 다락골에서 프랑스로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작성하였다.
샤스탕 신부가 도착하자 두 신부는 조선 교우들에게 사제가 없는 동안의 생활지침 등이 담긴 편지를 남기고 9월 7일 다락골을 떠나 홍주로 자수하러 갔다. 두 신부 외에 다락골 출신의 최해성(요한)과 최대종(요셉)이 같은 시기에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기해박해로 다락골은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나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교우촌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68년 17세의 나이로 순교한 임만억(야고보)은 1851년경 다락골에서 태어났다.
또한 1866년 갈매못 순교자들의 이장기(병인순교자면례)에 등장하는 임 회장은 다락골에 사는 교우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다락골이 비교적 안전한 교우촌으로 박해 중에도 계속 유지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울러 다락골을 연구함에 있어 풍천 임씨들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하다.
다락골 북쪽의 화암리는 대대로 내려오는 풍천 임씨들의 집성촌이다.
임만억의 경우 ‘풍천 임가’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고, 임 회장 역시 같은 성씨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다락골 교우촌은 경주 최씨와 풍천 임씨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마을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모방, 샤스탕 신부의 다락골 피신과 자수(1839년)

어떤 마을 근처에 도착하자 (李) 토마스는 거기서 아마 어떤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만 교우들에게 말을 시키기 위하여 혼자 가고 싶다고 포교들에게 말하였다. 몇 마디 의논이 오고 간 후 그가 내세우는 이유가 하도 명백하여 보이기 때문에 혼자 떠나게 하였고 (崔)베드로는 볼모로 잡혀 있었다. (李) 토마스는 빠져나오자마자 몸을 숨겨 선교사를 두고 온 마을로 가는 길로 도로 들어섰다. 길을 가는 중에 정 안드레아를 만나 둘이 함께 와서 일어난 이야기를 하였다. 모방(Maubant) 신부는 이런 말을 썼다.

“포교들의 번지르르한 말에서 내가 끌어낸 첫 번째 결론은 우리가 곧 숨어야 되겠다는 결론이었습니다. 나는 정 안드레아에게 이제부터는 천주교의 공개문제에 관한 한 포교들의 약속도 믿지 말고, 친필로 쓴 글을 지닌 우리 복사(服事)중의 하나가 아닌 이상 아무도 믿지 말라고 말하고, 그때까지는 숨을 수 있는데 가서 숨어 있으라고 일렀습니다.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샤스탕(Chastan) 신부와 나는 남도(南道)로 가서 피난하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8월 23일(양력) 금요일 아침, 전라도의 교우 한사람이 다래골에서 우리를 만나 안전한 피신처를 발견하였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으로 샤스탕(Chastan) 신부가 그와 함께 떠났고, 같은 길잡이가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3일 동안 포교들은 이(李)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린 다음 자기들이 속아 넘어간 것을 알고 崔 베드로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몹시 당황하였다. 어떤 자들은 그들의 위선적인 책략을 그에게 계속해 보자고 하고 다른 자들은 그를 곧 관헌에 인도하여 고문을 시켜 자백을 좀 얻어내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오랫동안 토론한 끝에 그들은 (崔) 베드로는 한 나절을 매달려 있다가 풀려났다. 그가 반쯤 죽어 의식을 잃은 것 같으므로 어떤 방에 뉘어 놓았다. 포교들은 문 밖에서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들의 말은 이러하였다.
“우리가 잘못했네. 이런 고문은 아무 소용도 없단 말아야. 아녀자들이 매를 맞으면서도 아무 말도 안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신부들의 심복 중의 한 사람이 그들을 밀고하리라고 믿는단 말인가. 일은 다 글렀네.” 그리고는 매질을 한 사람에게 비난을 퍼부으니, 이 자는 기분이 나빠서 나가 버렸다. (崔) 베드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다 들었으나 포교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포교들은 그에게로 다시 와서 말하였다. “그 머저리는 너무 포악하게 굴어서 당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소. 우리는 당신이 소식을 들여오기를 기다리기로 결정하였소.”
그래서 길을 떠났는데, 오래지 않아 (李) 토마스는 거기서 가까운 마을에 혼자 가서 신부들의 처소를 알아오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포교들이 거절하니 (崔)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들 있는 데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 터이니까 당신들과 같이 가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네 마음대로 나를 어디로든지 데려가 주시오.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해 볼 것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포교들이 말하였다. “당신이 우리 말을 믿지 않으니 서울로 올라갑시다. 주교를 어떻게 대우해 드리는지 보고 나면 당신의 의심이 풀릴 것이오.” 그대로 행하여졌다.
서울에 올라와서 (崔) 베드로는 어떤 포교 집에 유숙하면서 친구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그를 속이기 위하여 옥방 하나를 밤사이에 서둘러 도배장판을 하여 꾸미고 앵베르(Imbert) 주교를 데려갔다. (崔) 베드로가 주교 앞으로 인도되어 가니 주교는 그에게 이내 말하였다. “신부들이 어디 계신지 아는가.” (崔) 베드로는 대답하였다. “좀 찾으면 아마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교는 다시 말하였다.“그들이 내 편지를 받아 본 줄로 생각하는데 자네가 다른 편지 한 장을 그들에게 전해주겠나.”“주교님 명령을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앵베르(Imbert)주교는 글 몇 줄을 써서 그에게 주었다. (崔) 베드로는 하직하고 물러갔다.
포교들은 몹시 기뻐서 그를 칭찬하며 주교를 정성스럽게 대우하는데 대한 이야기를 중언부언하였다.
그러나 (崔) 베드로는 그들의 칭찬에 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 그때부터 두 가지 목표를 정하였다. 자기가 맡은 편지를 비밀히, 그리고 확실하게 선교사들에게 전하고, 할 수 있는 대로 도망친다는 것이었다. 그는 몇몇 교우 집에 가서 신부들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포교들이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으므로 아무도 대답하려 하지 않았고, 이리하여 그를 혼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충실하게 세 번까지 돌아와서 포교들의 의심을 가라앉힌 다음 수소문하러 간다는 핑계로 저녁때 쯤 나가서 산으로 도망하였다. 그와 아는 교우들이 편지를 주교에게 전하기로 하였고 (崔) 베드로는 신부들이 편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전한 곳에 가서 숨었다.

샤스탕(Chastan) 신부가 우리가 위에 말한바 있는 은신처로 가려고 모방(Maubant) 신부를 떠나자마자 모방(Maubant) 신부는 洪州에서 40리 떨어진 곳에서 주교의 첫 번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라틴어로 이런 말이 적혀있었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칩니다. 신부들이 아직 배를 타고 떠나지 않았으면 孫啓昌과 함께 오시오. 이 사람은 捕卒 백여 명을 거느리고 선교사들을 잡으러 온 두목이었다. 모방(Maubant) 신부는 곧 이 편지를 동료에게 보내어 아주 급히 돌아오라고 이름과 동시에 위에 말한捕卒 頭目에게 아래와 같은 글을 보냈다.
『羅神父(Maubant 신부의 조선식 姓인데 조선말에도 그대로 쓰였음)는 孫啓昌에게 알립니다. 나는 鄭神父(Chastan 신부의 조선식 姓)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나를 기다리는 발게머리로 곧 갈 수없소. 우리는 한 10일 안으로 그리로 함께 가겠소. 나는 그대가 마음이 변하여 죽은 뒤에 복된 나라로 가기를 바라오.』 샤스탕(Chastan) 신부는 새 은신처에서 9월 1일(양력)에 앵베르(Imbert) 주교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즉시 모방(Maubant) 신부 있는 곳으로 갈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편지를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므로 그 날로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써서 가족에게 하직을 하였다. ..............................................(중략)............................................................ 두 선교사는 다시 한자리에 모여 그들의 주교의 권고를 따를 채비를 차렸다.
그들은 각기 그들이 포교한 교우들을 위로하고 그들이 신앙을 굳세게 하며, 주위사정으로 필요하게 된 여러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하여 교우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러는 동안 崔 베드로가 가지고 온 앵베르(Imbert) 주교의 편지를 받았다.
 

<샤를르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중에서>

 

다락골이 교우촌이 되기까지

이곳에는 전국 최다 순교자 묘와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님의 탄생지가 있으며 순교자들이 살던 집터들이 남아 있습니다. 이곳을 속칭 다래골이라 하는 데, 교회사에는 옛지명인 홍주 다릿골로 나오며, 현재의 행정상 지명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입니다. 서해안에서 가장 높은 해발 791m의 오서산 바로 밑에 위치해 있습니다. 지형이 다락 같이 생겼다 하여 다락골이라 불리며 한편 다래가 많이 나기도해서 다래골로도 불렸다 합니다. 어떤 책자에는 다릿골로 나와 있기도 합니다.

이곳 다락골은 한때 열심한 교우촌이었습니다.
조선 정조 15년에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이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운 이른바 진산 사건으로 인해 발생하였던 1791년 신해박해가 발생하였습니다. 한국 천주교 창설 때부터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권고를 받고 교우가 된 이씨 부인은 이 박해를 피해 12살의 아들인 최인주를 데리고 서울에서 이 마을에 정착하였습니다. 이씨부인은 최양업 신부님의 증조모가 되며 최인주는 최양업 신부님의 할아버지가 되는 셈입니다. 이씨부인이 이곳에 온지 4~5년이 지나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700여미터 떨어지 새터에 땅을 일궈 농사를 시작하였고, 이씨부인은 경성부인으로 예법과 바느질에 능통하였고 경주 최씨와 집안 간이 되므로 경주 최씨 마을인 이곳 사람들과 쉽게 친숙해졌습니다. 이씨부인의 아들 최인주는 6남매를 두었는 데 그중 막내가 바로 최경환 성인이십니다.

최경환 성인은 내포지방의 사도인 이존창의 후손으로 홍주에 살고 있던 이성례와 혼인하여 최양업 신부님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과 집안인 어머니를 둔 최양업 신부님은 김대건 신부님과 진외 6촌간이 됩니다.
최경환 성인이 장가를 들고 사흘만에 재행을 가니 처가 동네 교우 여인들이 몰려와 “구교집 서방이니 교리를 듣자.”며 신랑을 달아 먹으려 했을 때 사실 교리에 대하여 밝지 못한 최경환 성인은 망신을 당하고 집으로 돌아와 칠극(七克)이라는 책, 즉 칠극대전(七克大全)의 약칭으로 죄악이 되는 일곱가지 뿌리와 이를 극복하는 일곱가지 덕행을 다룬 수덕서를 며칠 밤을 새워 다 외우고 나니 교리에 밝아져 강론을 잘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곳은 미신이 성행하여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자 가족과 상의하고 교우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로 이주하였습니다. 서울에 갔지만 그곳에서는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으로 갔다가 다시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 서북쪽에 있는 수리산에 정착을 하여 교우촌을 건설하고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습니다. 한평 1839년에 큰아들 최양업을 모방 신부님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고, 박해의 손길이 충청도 땅에도 거세게 몰아쳐와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특별히 병인박해는 불란서 함대의 침입과 독일 상인 옵페르트가 해미 근처 덕산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였는데 천주교 신자들이 자기 아버지 묘를 파헤쳤다고 생각하고 내포지방 천주교 신자를 없애 버리려는 악의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박해가 내포지역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이곳 다락골도 교우촌으로 발각되자 포졸들이 급습하여 교우들을 잡아가고 방화와 약탈을 감행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교우들을 순교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지금도 마을의 구전에 의하면 “천주교를 믿으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니 절대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고 옛 어른들이 대대로 유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좋은 확실한 것들이 밝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