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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 성지

새터 성지

최양업사제와 부친 최경환 성인의 탄생지

줄무덤 성지 입구에서 도로를 타고 아래쪽으로 약 1킬로 내려가면 새터마을이 있다.

다락골의 입구인 이곳을 ‘샛터’라 부르는데, 이곳은 한국인으로서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와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 코, 1805-1839) 성인이 태어난 곳이다.

최경환 성인의 아버지는 최인주이다. 그는 12살이 되던 해에 서울에서 홀 어머니 경주 이씨를 모시고 살다가 1791년 진산사태로 시작된 신해 박해를 피해 이곳 ‘샛터’로 이주, 정착을 하게 되었다. 최인주는 성장하여 결혼을 해 슬하에 3형제를 두게 된다. 그 중 막내 아들이 1984년 5월 6일 시성된 최경환(프란치스코)이며, 최경환의 여섯 자녀 중, 장남이 최양업(토마스) 신부이다. 이 때부터 이곳에서 700m 쯤 떨어진 다락골에 천주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여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교우촌을 형성하며 살아가게 된다.

새터 성지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그의 아들 최양업 토마스 사제 부자가 태어난 곳이다.

현재 다락골 성지는 크게 새터와 줄무덤 두 부분으로 나뉜다. 새터와 다락골 일대는 박해시대 교우들이 삶을 영위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최경환 성인이 태어나 이성례(마리아)와 결혼하였고,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여러 형제들이 탄생하고 성장하였다.

사실 다락골 새터와 줄무덤을 분리하여 검토하기는 쉽지 않으나, 여러 기록을 보면 다락골이 처음에 주목받은 곳은 새터였다. 최양업 신부가 탄 생한 새터가 먼저 답사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명 순교자 줄무덤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1827년경 그 집안이 좀 더 나은 신앙생활을 위 해 다른 곳으로 떠날 때까지 다락골은 미래의 성인과 사제, 그리고 순교자들을 길러낸 터전이었다.
그 집안이 떠난 후에도 교우촌으로 계속 남아 있던 다락골은 병인박해(1866) 이후 소멸되었다. 포졸들에 의해 발각된 교우촌은 ‘전부 동네를 불 질렀다’ 고 전하는데, 어떤 과정을 통해 소멸되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현재 성지에서 고증 작업과 개발 중에 있다.

경주 최씨 집안의 다락골 정착

한국 교회사에서 다락골은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고향으로 주목을 받는다.

본래 서울에서 살던 이 집안의 천주교 입교와 다락골 이주는 다락골 교우촌의 형성을 이해하는데 핵심 사항이다. 이들의 이주는 다락골에서 기존에 거주하던 주민들, 특히 경주 최씨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연구가 이 단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최경환 성인 집안은 족보상 경주 최씨이며, 다락골에는 경주 최씨들이 오래 전부터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화숙공파의 족보와 묘의 위치를 참조하면 적어도 1600년대 초반부터 그곳에 최씨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경환 성인의 후손들이 소장한 족보와 가승(家乘)에 의하면, 이 집안은 경주 최씨 관가정공파(觀家停公波)에 속한다. 두 파는 같은 계보로 내려오다가 화숙공파가 7대에 이르러 분파하면서 관가정공파와 서로 나뉘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최경환 집안의 다락골 이주는 최상종의 「최 신부 이력서」의 표현대로 “정처 없이 떠나 방향 없이” 이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무명 순교자 줄무덤의 주변 묘만을 보아도 최경환 성인 집안이 정착하기 훨씬 전부터 최씨 문중의 묘가 다락골에 자리하였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름이 밝혀진 6명의 다락골 출신 순교자들 중 4명, 즉 최신덕(1805), 최봉한(1815), 최해성(1839), 최대종(1840)이 최씨 성을 가졌다는 점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최경환 성인 집안의 입교 과정

최경환 성인 집안은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최상진이 1787년경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우면서부터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들은 본래 서울에 살았으나, 1791년 진산 사건에 의해 근간이 된 신해박해가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 성숙하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최경환의 부친 최인주와 할머니(최한일의 아내) 경주 이씨는 이주라는 큰 결심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서울에서 그들의 친척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머나먼 땅인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로 가족들을 거느리고 이사를 하게 된다. 사실 그들에게 이 곳은 신앙생활을 성숙되게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왜냐하면 산골 깊숙한 곳에 자신들의 친척들이 대거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좋은 입지 조건 속에 정착해 살며, 자연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알리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최경환 성인 집안의 입교와 다락골로의 이주, 그리고 기존에 이곳에 살고 있던 경주 최씨들과의 관계는 면밀히 연구되어야 할 교회의 숙제이다. 왜냐하면 무시무시한 박해의 시절에 목숨을 담보로 경주 최씨 문중의 묘역 안에 천주교 무명 순교자들을 매장하여 지금의 줄무덤 40기(현재 37기 잔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병인 박해(1866) 시절에 포졸들에 의해 발각된 다락골 교우촌이 어떤 과정에 의해 소멸되었는지 고증되어질 때 전체적인 다락골 교우촌의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

결국 이 관계가 명확히 드러난다면 최경환 성인 집안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고, 다락골 교우촌 전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